네 개의 바퀴가 아스팔트에 새기는 소음은 한때 도시의 불온한 배경음악이었다. 정해진 규칙과 경로를 거부하며 길 위에서 자신만의 동선을 그려나가는 스케이터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생동하는 저항의 언어였으나, 이제 그 언어는 올림픽 포디움이라는 가장 제도적인 공간에서도 울려 퍼진다. 이 극적인 여정의 가장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들 중 하나는 스케이터의 신체와 보드를 연결하며 모든 기술의 시작점이 되는 지점, 바로 스니커즈에 있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케이트보딩

스케이터들이 스니커즈를 선택하는 기준은 각자의 스타일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어떤 이는 섬세한 보드 컨트롤을 위해 유연함을 택하고, 다른 이는 큰 충격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견고함을 추구한다. 이처럼 기능에서 출발한 스케이터들의 스니커즈 씬을 지배해 온 것은 나이키, 컨버스 등의 거대 브랜드들. 농구화를 비롯한 스포츠화를 꾸준히 출시하던 이 브랜드들의 몇몇 스니커즈는 스케이터들에게 필요한 기능을 충족하며 씬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브랜드들은 이에 화답하듯 스케이터들을 겨냥한 전문 스니커즈 라인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반스처럼 처음부터 서브컬처 문화를 중심 철학으로 삼아 온 브랜드들도 이 시장에 합류해, 저마다의 특징과 디자인을 앞세워 오랜 기간 경쟁 구도를 유지해 왔다.

도쿄 올림픽에 등장한 카리우마 '카티바 프로'

하지만, 최근에는 이 견고한 구도에 파문을 일으킨 브랜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는 ‘카리우마(Cariuma)’.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시상대의 두 자리를 차지하더니, 2024년 파리에서도 정상급 선수들의 선택을 받으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도시 환경적 구조나, 서브컬처 특유의 반항적 이미지로 인해 널리 향유되지 못하던 스케이트보드 문화가 올림픽을 통해 새로운 확장의 계기를 맞은 지금. 무엇이 세계 최정상 스케이터들을 이 새로운 이름에 열광하게 했는지, 여전히 굳건한 아이콘인 브랜드들을 신는 스케이터들의 선택에 담긴 가치는 무엇인지 확인해 보자.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가치로 증명하다

파리 올림픽에서 카리우마 '발레리 프로'를 신은 재거 이튼

'발레리 프로'를 신고 있는 마이크 발레리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포착된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 선 카리우마. 이 신예 강자의 등장을 가장 극적으로 알린 인물은 현시점 가장 주목받는 스케이터, ‘재거 이튼(Jagger Eaton)’이다. 파크의 거대한 경사면을 유영하다가도, 스트리트의 날카로운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그의 전천후적인 재능은 2020년 도쿄 올림픽 동메달과 2024년 파리 올림픽 은메달의 결과로 증명되었다. 이 다재다능한 스케이터가 선택한 신발은 카리우마의 ‘발레리 프로(VALLELY PRO)’ 모델. 80년대 스케이트보드 씬을 개척한 살아있는 전설 마이크 발레리의 시그니처 모델로, 그의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을 계승한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카리우마 '발레리 프로'

발레리 프로는 유연한 벌카나이즈드 솔을 채택해 발바닥으로 보드의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면서도, 100% 천연고무 밑창과 LWG 인증 스웨이드 갑피를 통해 카리우마가 표방하는 지속가능성과 뛰어난 내구성, 접지력을 모두 확보했다. 이러한 재거 이튼의 선택은, 전문 스케이트보더로서 그 헤리티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지속가능성이라는 미래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2020년 도쿄에서 시작된 카리우마 열풍의 또 다른 증거는 당시 은메달을 획득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브라질의 테크니션, ‘켈빈 호플러(Kelvin Hoefler)’. 그의 이름을 딴 시그니처 모델 ‘호플러 T20(Hoefler T20)’은 그의 정교하고 기술적인 스케이트보딩 스타일을 완벽하게 지원하기 위해 탄생했다.

카리우마 '호플러 T20 프로'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고난도 기술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마모가 잦은 부분에 삼중 스티치와 고무 보강재를 덧댔으며, 높은 곳에서의 충격을 흡수하고 발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컵솔 구조를 채택했다. 코르크와 마모나 오일로 만든 인솔로 최적의 쿠셔닝과 지지력을 제공하는 것은 덤. 이는 B-Corp 인증을 통해 사회적, 환경적 책임을 다하는 브랜드가, 선수의 요구에 가장 깊이 귀 기울여 만든 최상급 퍼포먼스 장비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선택지로 떠오른 카리우마는 특히 최근 국내에 정식으로 론칭해, 이제 한국의 스케이터들도 그들의 철학과 기술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기간 지켜온 전통을 대표하다

카리우마가 이처럼 새로운 가치를 앞세워 씬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는 와중에도, 수십 년간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지탱해 온 전통의 강자들이 구축한 팬덤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스포츠 거인의 위용으로 씬을 장악했던 나이키는 여전히 무난한 스케이트보드용 스니커즈 선택지 중 하나. ‘나이키 SB 덩크 로우(Nike SB Dunk Low)’를 선택한 대표적 스케이터로는 스케이트보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호리고메 유토(Yuto Horigome)’가 있다.

나이키 SB 덩크 로우

나이키 SB 스니커즈를 신은 스케이터들

본래 1985년 미국 대학 농구 리그를 위해 탄생한 덩크는 90년대 스케이터들이 그 단단한 내구성과 편안한 착화감에 주목하며 스트리트 서브컬처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했다. 나이키는 이 흐름에 응답하여 2002년 스케이트보딩에 특화된 SB 라인을 공식적으로 론칭했고, 기존 덩크의 실루엣은 유지하되 발등을 보호하기 위해 두툼하게 패딩 처리된 설포와 발바닥의 충격을 흡수하는 줌 에어 유닛을 탑재하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

나이키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스케이트보드 그 자체가 된 브랜드는 바로 반스. 처음부터 길 위의 스케이터들을 위한 브랜드로 탄생한 반스는 ‘Off The Wall’이라는 슬로건처럼 제도권 밖의 문화를 지지하며 성장했다. 우아하고 독창적인 스타일로 주목받는 플로리다 출신의 스케이터, ‘비아트리스 도몬드(Beatrice Domond)’는 이러한 반스의 헤리티지와 혁신을 동시에 보여주는 ‘자바 미드(Zahba Mid)’를 선택했다.

반스 '자바 미드'

반스의 최신 기술력이 집약된 자바 미드는 보드 필과 충격 흡수라는 상반된 가치를 모두 잡기 위해 개발된 임팩트와플 아웃솔로 발 앞부분의 유연함과 뒤꿈치의 안정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바이오 기반 폼으로 만든 미드솔과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는 등, 반스의 지속가능성 가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제품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다

타이션 존스

아디다스 '타이션'을 신은 타이션 존스

그 어느 문화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스케이트보드 문화에서,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며 스스로 하나의 브랜드가 된 스케이터들도 있다. 이들의 스니커즈 선택은 단순히 기능이나 헤리티지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선언인 셈. 그 가장 압도적인 예시는 뉴욕의 왕이라 불리는 ‘타이션 존스(Tyshawn Jones)’다.

아디다스 '타이션'

두 번이나 스케이트보드계 최고 영예인 ‘올해의 스케이터(SOTY)’에 선정된 그는 폭발적인 파워로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의 장애물을 가볍게 넘으며 스트리트 씬을 지배했다. 그의 시그니처 모델인 아디다스 ‘타이션(Tyshawn)’은 이러한 그의 캐릭터를 신발에 그대로 이식했다. 80~90년대 농구화에서 영감을 받은 미드컷 디자인으로 발목에 안정적인 지지력을 제공하며, 아디다스의 농구화에 사용되는 쿠셔닝 기술을 미드솔에 적용해 높은 곳에서의 충격을 흡수한다. 마모가 잦은 앞코에 보강재를 덧대 내구성을 확보한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이 새겨진 골드 포일 브랜딩으로 위엄을 완성했다.

타이션의 스니커즈가 뉴욕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상징한다면, ‘루이 로페즈(Louie Lopez)’의 선택은 절제된 세련미와 기술적 완성도를 대변한다. 노아, 퍼킹 어썸 등 서브컬처 브랜드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그의 시그니처 모델인 컨버스 ‘루이 로페즈 프로(Louie Lopez Pro)’는 밸런스를 중시하는 그의 스케이팅 철학을 반영하듯, 클래식 테니스화의 미니멀한 실루엣을 스케이트보드 스니커즈로 재해석했다. 겉모습은 단정하지만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스웨이드 갑피 안쪽에 고무를 덧대고, 충격 흡수와 보드 필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인솔을 탑재하는 등 핵심적인 기능에 집중하며 조용하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기술력을 넘어 가치관까지

스케이터가 신는 스니커즈는?

카리우마 '카티바 프로'

서브컬처의 대명사에서 이제 어엿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며 하나의 주류 스포츠로 자리 잡은 스케이트보딩. 이제 이 문화는 소수의 전유물을 넘어 더 넓은 대중과 호흡하기 시작했다. 씬의 외연이 확장된 만큼, 그 안을 채우는 스케이터들의 선택과 그 의미에 관한 관심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렇기에 스케이터의 스니커즈는 이제 기술적 우위나 역사적 정통성을 넘어, 한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관까지 드러내는 다층적인 텍스트로 기능한다.

파워, 기술, 스타일 등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 온 스케이터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올림픽 시상대에서 증명된 최상급 퍼포먼스를 갖춘 스니커즈 브랜드가 선수의 요구를 디자인에 직접 반영하는 섬세함과, 구호에 그치지 않는 검증 가능한 친환경적 신념이라는 가치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테다. 스케이트보드를 즐긴다는 것이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를 발끝으로 표현하는 일로 확장된 지금, 오늘 당신이 신은 보드와 맞닿은 스니커즈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 선택들이 모여, 한국 스케이트보드 씬의 다음 챕터가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