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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이(Sakai)를 떠올리면 이솝 우화의 대표적인 우화 ‘토끼와 거북이’가 생각난다. 수많은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큰 주목을 받다 어느샌가 잠잠해지는 요즘, 그는 천천히 또 천천히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사카이(Sacai)의 수장이 되어 있다. 사카이(아베)는 레이 가와쿠보,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의 뒤를 이어 일본의 2세대 패션 디자이너로 각광받고 있고, 무엇보다 최근에는 나이키와 다양한 협업을 선보이며 스니커헤드의 구미를 당기고 있기도. 토끼보다 거북이에 가까운, 디자이너 그리고 브랜드로서의 사카이가 궁금하다면 지금 스크롤을 내려 슈프라이즈와 함께해보는 게 어떨까. 


    | 치토세 아베, 혹은 치토세 사카이


    1965년 일본 나고야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치토세 아베. 유년 시절을 나고야에서 보낸 그는 재봉사였던 어머니와 함께 종종 인형의 옷을 만들거나 TV와 잡지를 통해 ‘패션’을 즐겨 찾곤 했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던 중 자연스럽게 그의 눈에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당대 최고의 일본 디자이너로 꼽혔던 이세이 미야케. TV 광고를 통해 우연찮게 이세이 미야케를 접한 아베는 그렇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재의 건축가,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아베는 자신의 꿈을 이어 나가기 위해 나고야 패션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곧장 향한 곳은 고베에 위치한 거대 패션 회사 World Co.. 대학 졸업 이후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도 분명한 ‘엘리트 코스’였을뿐더러 본격적으로 디자이너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독창성’을 추구하던 아베는 한창 빛을 발하던 일본의 아방가르드 패션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고, 그런 그에게 있어서 대중을 타겟으로 브랜드 사업을 전개하는 World Co.는 지루함 그 자체였다. 


    재미없는 일은 결코 못하고 사는 성격인 걸까. 아베는 World Co.를 단 1년 만에 내팽개치고 아방가르드 패션의 선봉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꼼 데 가르송에 입사한다. 꼼 데 가르송의 창립자 레이 가와쿠보는 아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의 창립 멤버로 기용한 바. 아베는 이곳에서 니트웨어 및 패턴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패션 및 예술과 비즈니스의 균형 감각에 대해 배워 나가게 된다. 


    치토세 아베에게 꼼 데 가르송은 성공적인 커리어의 기틀을 닦은 터전 임도 분명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를 쟁취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사랑’인데, 1996년 <꼼 데 가르송 준야 와타나베>에서 동료로 함께했던 디자이너 준이치 아베와 결혼을 한 것. 여태껏 ‘치토세 사카이’라 불렸던 그는 일본의 부부동성 제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치토세 아베’라는 이름을 가지고, 약 1년이 지난 시점인 97년도에 출산을 하게 된다. ‘결혼’과 ‘자녀’라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얻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그의 중심이 되었던 ‘패션’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멀어졌을 터.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약 8년이라는 시간을 뒤로하고 꼼 데 가르송에서 퇴사한다. 



    | 브랜드 SACAI의 시작

    아베는 약 2년간 전업주부로서 가정에 충실한다. 당연히 그는 ‘크리에이티브’와는 거리가 먼 반복적인 생활을 힘들어했고 1999년, 남편 준이치 아베의 설득에 따라 집안에서 자그마한 패션 레이블을 런칭하기로 결심한다. 브랜드 명은 ‘SACAI’. 결혼 전의 성이었던 ‘SAKAI’에서 알파벳 ‘K’를 ‘C’로 바꾸어 만들어 낸 이름이다. 당시 사카이의 모든 아이템 생산은 물론, 비즈니스 운영 역시 집 안에서 육아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아베는 2003년 도쿄 다이칸야마에 자그마한 스튜디오를 오픈하기 전까지 이러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 


    꼼 데 가르송에서 니트웨어를 디자인 한 아베였기에, 초기 사카이는 수작업으로 제작된 니트웨어를 브랜드의 주축 상품으로 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치토세 아베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드는 것. 아무리 컨셉이 뚜렸한 아이템이라도, 스스로가 진정으로 입고싶은 옷인지를 되물으며 그 디자인을 완성해 낸다고 하는 만큼, 사카이는 아베에게 의미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나가는 자그마한 브랜드로 오랫동안 그 성격을 유지했다. 


    인상 깊은 점은 대대적인 마케팅 없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점에 있다. 잡지에 실리거나 스타일리스트 및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열성적인 팬들의 입소문을 타 성장한 것이다. 조금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2006년에는 ‘사카이 젬(sacai gem)’이라는 새로운 남성 라인을 설립하고, 이를 ’10 꼬르소 꼬모 꼼 데 가르송’ 및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한정으로 전개하며 해외 진출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브랜드 설립 10년이 지난 시점에 프랑스 파리로 향하며 사카이는 본격적으로 세계를 무대로 그 가치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 아방가르드

    사카이 2010 봄 레디 투 웨어 컬렉션


    아베가 앞서 꼼 데 가르송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터. 사카이는 파리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이전 보다 빠르게 성장해 나간다. 2010 봄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을 선보이는가 하면 같은 시기 전체 남성복 컬렉션을 공개하기도. 그리고 마침내 2011 가을 시즌에는 파리 런웨이에 오르기도 한다. 


    치토세 아베의 사카이는 ‘소재’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매 시즌 컬렉션에서 어떠한 옷을 만들지 정하기보다 소재를 선택하고 개발하는 단계가 앞서 있는 만큼. 이렇게 만들어진 고급 소재들은 형형색색의 과감한 실루엣 속에서 밝게 빛나는데, 예를 들자면 예상치 못한 부분이 덧대어지고 잘려 나가거나, 안감이 밖으로 나오고, 다양한 컬러와 핀스트라이프, 체커보드, 플레이드, 레오파드 패턴이 뒤섞이는 곳에서 말이다. 결과물은 편안하고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독특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다.


    사카이는 파리에서 지난 10여 년간 일본에서 갈고닦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꽃피웠다. 다양한 클래식 아이템들에 치토세 아베의 감각이 더해져 완성된 작품들은 ‘입을 수 있는 아방가르드’로 통용된다. 이는 흔히 ‘하이브리드 패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카이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따라 충분히 일상생활에서 착용할 수 있는 만큼의 실험적인 디자인들은 패션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 | 협업


    유럽 패션계에서 인정을 받은 사카이가 단순히 ‘잘 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넘어 지금의 인지도 (100만 명이 넘는 인스타 팔로워가 좋은 예시이다)를 가지게 된 이유는 다양한 브랜드와 활발한 협업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협업에 임하는 자세는 언제나 ‘즐거움’. 그 무엇보다 즐기는 것을 중요시 여겨 재미가 없다면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는 브랜드가 어느 한 기업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독립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나이키 등의 스포츠웨어, 디올과 같은 럭셔리 패션이 이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예시이다. 그 어떤 브랜드와도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사카이의 이러한 모습은 치토세 아베가 꼼 데 가르송에서 몸소 배운 자율성에 기반해 더욱더 그 진가를 발휘한다.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이키 협업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이키랩’의 스포츠 아이덴티티와 치토세 아베의 디자인 코드가 맞물려 탄생한 두 브랜드의 첫 만남은 실용적인 디자인과 눈길을 사로잡는 색감으로 디자인된 다양한 어패럴 및 에어 맥스 90, 그리고 덩크 하이 럭스 등으로 꾸려졌다. 2017 가을, 겨울 시즌 중 선보인 노스페이스와의 협업도 두고두고 회자되는데, 푸퍼 재킷은 물론 피쉬테일 파카와 MA-1은 클래식 실루엣을 유지하면서도 사카이의 미학이 가미돼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나이키 블레이저, LD와플, 베이퍼와플로 스니커 신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다 주고 언더커버, 프라그먼트 디자인, 포터, 헨더 스킴, 반스, 아페쎄, 클롯, 꼴레뜨, 디올, 카우스 등과 힘을 합쳐 수많은 패션인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는 사카이다. 


  •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난무하고 있는 현시대에 ‘진짜’ 아방가르드 패션을 제시하고 있는 사카이다. 이들이 굳건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초기 팀원, 그리고 재미에 초점을 맞춰 브랜드를 전개하기 때문. 평생의 스승 레이 가와쿠보와 준야 와타나베는 물론,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의 뒤를 잇는 치토세 아베의 사카이는 준 타카하시의 ‘언더커버’, 니고의 ‘베이프’, 타카히로 미야시타의 ‘넘버나인’으로부터 바통을 건네 받아 현재 일본 패션을 앞장서 이끌어 나아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괜히 칼 라거펠트, 안나 윈투어, 그리고 신진 패션 디자이너 및 브랜드 발굴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사라 무어의 극찬을 받은 게 아닐 터다.